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단 편집) === 산업 발전 === [[송나라]] 시대처럼 상공업 발전이 유리한 시대에는 유교를 따르는 사람도 '민본'과 같은 이유로 세금을 줄이면서 상업을 장려하고는 하였다. 지폐나 어음 같은 것을 서양보다 빨리 만드는 것은 방해되지 않았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5378|#]] [[인류]]는 유전체가 99.9% 같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지능은 어디에 살든지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외세의 흥망성쇠, 기후, 우수한 작물을 들여오는 사건 등에 따라 복합적으로 상공업이 발전하거나 농업이 발전하고는 하였다. 이언 모리스와 같은 이와 같은 요소를 연구하던 학자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여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유럽이 신대륙으로의 항해가 훨씬 고난도였던 중국 일대에 비해 상업이 유리했다고 주장하였다. [[https://kgjj.tistory.com/entry/%EC%9D%B4%EC%96%B8-%EB%AA%A8%EB%A6%AC%EC%8A%A4-%EC%99%9C-%EC%84%9C%EC%96%91%EC%9D%B4-%EC%A7%80%EB%B0%B0%ED%95%98%EB%8A%94%EA%B0%80Why-the-west-rules-for-now-3-%EB%B3%B8%EB%A1%A0-2%EB%B6%80?category=857084|#]][[https://m.blog.naver.com/hong8706/40195219906|#]] 그 자세한 사정은 [[정화의 대원정]] 문서를 참조할 수 있다. 그 전만해도 동양이 더 부유했다는 논자도 존재한다. '''사상으로 굳이 통제하지 않아도 농업이 불리한 중동이나 기타 [[유목]] 문화권처럼 상업으로 부를 쌓고 식량을 구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고, 중국처럼 농업이 유리할 수 있다. 사상으로 유리한 산업을 막으려고 해도 약간의 [[문화 지체]]만 가능하고 장기적으로는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교역에 따른 수입이 어려운 지정학적 여건이면 자연적으로 농업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며 그렇지 않으면 상업이 발달한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농업과 상공업은 각국의 철제 농기구의 사용, 조선의 [[고구마]]와 [[감자]] 수입의 예처럼 발전에 서로 영향을 미치지, 하나가 발전해야만 다른 것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초기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상인]]과 기술자를 유학자-관료나 농민보다 천하게[* 공자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자공]]이 상인 출신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본인도 상인의 급을 그리 높게 여기진 않았다.]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유교가 등장한 [[춘추시대]]에서는 중국 대륙의 많은 국가들은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가 생존의 가장 우선이었고, 물자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대륙 외부와 교역할 방법이 별로 없었기에 국력은 농업에 좌우되었다. [[제자백가]]의 사상가 중에는 [[농가]]가 있거나, 나머지는 정치에 대해 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등장한 유교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사(士)는 전쟁과 [[공권력]]을 실행할 수 있는 [[군인]], [[경찰]], 군대와 국가 행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는 [[관료]]를 말한다. 이들이 없으면 국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농민은 식량을 생산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의식주에서 의와 주를 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업 발전을 위한 농기구부터 각종 생필품에 군사력을 향상시킬 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계층이 바로 공이었다.[* 전세계를 막론하고 당장 구석기-신석기 시대부터 살펴봐도 수렵과 어로, 채집, 농업 활동이 '''원활하게'''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 각종 도구를 만들었고,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법 개발과 농기구의 개발, 개량 및 보급, 제방과 관개시설의 건설, 역법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공이 농을 뒷받침한다는 근거가 성립된다. 이러한 점에서 농이 공보다 앞섰다고 할 수는 있어도 농이 안정화되어야만 공이 제 기능을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중국 대륙에서 상은 사와 농, 공이 안정된 뒤에야 원활하게 기능하는 계층이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레 상의 우선 순위가 낮아진 것이다. [[국부론]]에서는 국가 부의 원천을 노동으로 잡았는데 이는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의 국가 부의 원천은 농업이라는 [[중농주의]]사상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농업과 공업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 즉 노동이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경제학상으로 볼 때 사농공상은 그 경제학상으로 짜여진 초창기 [[신분제]]로 보는 것이 맞다. 유교 문화에서 상인을 최하위 계층으로 놓는 것은 "본인이 직접 생산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남이 만들어놓은 물건을 그저 옮기기만 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상업 자체의 성격을 '''가치의 도둑질''' 비슷한 것으로 보면서 천시한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영화 [[전우치(영화)|전우치]]에서 현대 사회에 깨어난 전우치와 3도사의 대화에서 이런 사상이 드러난다. 왕이 없는데 누가 백성을 먹여살리냐는 전우치의 질문에 막내 도사는 "기업... 그러니까 상인들이 먹여살립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때 전우치가 "상인들은 자기들 이익만 챙기는 족속들인데 그런 자들이 백성들을 먹여 살린다니 말세가 다 왔구나..."라는 식으로 독백한다. 흥미롭지만 유럽에도 적으나마 이런 관점이 있었는데, 클래런스 대로의 책 "Crime and Criminals: Address to the prisoners in the cook county jail" 이 대표적인 예다.] 그랬기 때문에 일단 뭔가를 자기 손으로 만들기는 하는 (수)공업이 상업보다 더 위에 놓인 것이다. 상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 분야는 서양에서도 유대인이나 담당하는, 일종의 천역이었으며[* 공업 분야도 [[유대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유대인도 행정력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돈, 기술을 위해 쥐어짜이거나 심하면 추방당하거나 죽으며 고초를 겪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치즘]]에서의 [[반유대주의|유대인 혐오가]] 단순히 소수집단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전국가적 흐름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중세 유럽까지는 천한 일,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며 유대인에게 금융업을 강제시켜놓고 근대로 발전하며 금융의 가치가 대두되자 피어난 시기와 질투를 [[나치당|나치]]에서 선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악마적인 것'이라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했기 때문이다. 다만 유럽은 [[중세]] 문서에서 보듯 모든 상업을 천시한 것은 아니었고, 중세 중기는 농민보다 상인과 수공업자가 지위가 높았다. 통일신라나 고려의 경우에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보다는 상업을 천시하지는 않았다. 이슬람권은 전성기든 쇠락한 경우든 사막 기후에 도저히 상업이 아니면 생계를 영위하기 힘들어서 상업을 중시하기도 했고, 상업의 문제는 이자 금지와 같은 상업을 개선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서양에서 상공업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부, [[봉건제|봉건]] [[영주]]와 국가와 자유민과 자유도시가 서로 통합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한 알력, 더불어 구교와 신교 간의 알력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가며 얻어진 결과에 가깝다. 토지의 생산력이 안정된 이후 상공업에 통제와 제재의 욕구를 드러낸 것은 서양도 동일하나[* [[스페인]], [[프랑스]] 등.] 상공업 세력은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지로 피신할 수 있었고, 또 이들 국가는 좁은 국토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번영이 필요했으며,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은 국토가 좁고 해안을 넓게 끼고 있어 도시와 무역 위주로 행정력을 집중해 극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들 국가에 잘 들어맞았다. 또 여기에 신대륙으로부터 넘어오는 막대한 재화가 제동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 신교의 발흥과 인문철학의 발달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서양의 상공업 세력은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막대한 번영을 유럽 세계 전체에 과시할 수 있었고 그러자 서양 각국은 풍성한 열매로 맺힌 이 달콤한 번영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달콤함을 거부했다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쟁패에서 뒤처질 위험성이 있었다. 인문철학 역시 이 번영을 등에 업고 비합리적인 도덕적 낙인을 끈질기게 제거해 갔으며, 날로 번창하는 식민지 사업과 끊임없는 [[식민제국|각국의 쟁패는]] 서양 각국의 정력이 내부 통제에만 몰두하기보다 외부로도 충분히 투사되고, 효율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재화의 분배는 본래가 국가, 행정력의 직무이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상인의 역할로 넘어가게 된 것은 서양에서도 [[애덤 스미스]]로 대표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대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희대의 슬로건이 상인과 유산계급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자왈 맹자왈처럼 가가호호[* [[영국]]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건 표어는 스미스는 지나가듯이 언급한 정도인데, 이 슬로건의 완벽한 함축성과, 이 표어의 은유에 내재하는 세계관이 지닌 미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이 제창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줄 이로움에 감명을 받은 유산 계급들이 입이 닳듯이 언급했다. 정작 애덤 스미스가 극도로 경계한 한 집단에 의한 재화 독점을 국가에서 유산 계급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의미가 변질되었다.] 울려퍼진 덕분이다. 이 사농공상의 공상 천대 문화 때문에 동양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맹아론|자본주의 태동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다면 상업을 제일직업으로 삼고, 아예 중개무역을 주력으로 삼았으면서 수학과 과학을 나름 발전시켜왔던 중동에서는 어째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의문을 표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을 정말 진지하게 대표적인 하나의 반례로 받아들이고 왜 중동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유럽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해 논변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 왜냐면 첫째로 규모적인 면에서, 유럽의 거대함이 특수한 요인이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개중에서도 [[잉글랜드]]에서 발생했지 [[유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유럽 끝 [[러시아]]에 당도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다.] 또한, [[중동]]뿐 아니라 [[튀르키예]], [[인도]], 중국 등 규모적인 면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 기술 수준은 충족되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유럽의 다른 곳, 다른 시점이 아니라 왜 그 시기 잉글랜드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어느 학설도 정설로 인정받는 것은 없다. 그나마 산업혁명이 다른 데가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는지는 궁극적으로는 유럽 대륙의 문물은 받아들이면서 혼란을 피할 정도로 적당히 가깝고, 아메리카와 가까운 섬나라이자 석탄 사용이 가능한 안정적인 지정학적 여건을 드는 시각이 많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중국이나 일본도 서구의 개입 없이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일본은 빨리 잡아도 [[메이지 유신|19세기 후반이었고]], 한국은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되었으며, 중국은 청말 민국초의 혼란과 [[국공내전]], 공산화 직후의 혼란 때문에 공업화가 한국, 일본보다 더 늦었다.] 결국 헛발질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다. 반면 대놓고 [[해금령]]을 내려도 상업에 유리한 경제 조건에서는 명나라 [[영파의 난]] 이후처럼 아예 부작용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상업 탄압이 불가능하다. 사상적으로 상업을 탄압해도 후술할 일본처럼 상업이 융성하여 인식이 거꾸로 개선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현대 북한도 대놓고 사상적으로는 물론 물리력을 동원하며 상업을 탄압하고 있지만 민간인들이 굶어죽지 않으려고 막대한 이득이 남는, 한류 등이 들어오고 수뇌부의 자원 통제력에 따른 권력 약화로 인해 나라가 금지하는 중국과의 무역을 몰래라도 하려고 한다. 사실 당시 한반도에서 유학자들은 물론, 심지어 민간인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외무역을 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면 고려 때는 그나마 중개 무역이 번성했지만, 고려 말에 [[원나라]]가 무너지면서 많이 쓰이던 원나라 화폐가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고려의 경제가 엄청나게 흔들렸고, 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종속되면서 재정도 원나라 자산 비중이 상당히 높았는데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중앙정부의 재정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통째로 증발해버렸다. 이때문에 고려 말 대규모 왜구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입 등 여러 내우외환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이 꼴을 지켜본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국제 무역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내우외환이 진정되자 각종 산업과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청나라와 교류하던 [[임상옥]], 그런 부를 바탕으로 교역을 하던 [[김만덕]] 같은 거상이 등장할 수가 있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잘나가게 된 건 별 거 없고 우연적 요소다. 왜냐면 영국은 모직업이 이미 중세부터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주요 수출품이 모직으로 만든 직물제품일 정도였다.] 주기적으로 인도에서 들어오는 완성품 면직물에 대해 모직업자들이 법령으로 깽판을 놓았다. 그래서 완성품이 아니라 식민지로 만든 인도에서 싼 값에 면이 대량으로 들어왔고, 이 값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 치렀고, 영국 국내에서 이렇게 노예와 교환된 면으로 면 완성품을 만드는 시장이 어느 정도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생성된 면제품이 국내에서 팔리는 것만으로 산업이나 상업의 발달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 면제품을 수출하고 이제는 인도가 아니라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면을 받아먹는 무역이 완성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런데 반대로 조선은 이 조건들 중 단 하나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대만]]이나 [[필리핀]], [[보르네오]] 같은 곳에다 대고 [[노예 무역]] + 뭐든 간에 헐값에 원료를 들여와서 가공한 후 제법 값을 쳐서 팔 수 있으면서도 필수품급의 수요를 가져서 대량생산이 필요하면서도 최초 기계화에 필요한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야 하는 제품도 없고, 그러면서도 인건비보다 기계를 만드는 가격이 더 싼 환경이 아니었으며, 그리고 원료공급도 제품수출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경영처럼 광대한 토지에 계속 노예를 돌리면서 끝도 없이 늘어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당장에 조선의 주변국들인 중국와 일본은 조선이 상대할 수 없거나 일본도 조선처럼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여기에 지형적으로도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서 노예 문제는 노예가 늘어봐야 국가에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대영제국|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지속적으로 탄탄했으며 독립한 미국과도 그럭저럭 화해했는데 반해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포르투갈 제국|포르투갈]], [[스페인 제국|스페인]]과 싸운 이후 영국과 교역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이건 사상과 딱히 상관없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나는 상공업 수요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서민 농민 계층들을 바싹 밀어버려서 공업지대에 합류시킨 것도 모자라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져서 몇십만 명이나 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으로 밀려든 것도 큰 원인을 차지한다. 이런 우연적 요소들에 사상을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억지 주장이다.[* 면직물 말고 다른 산업, 공업, 상업이 잉글랜드에서 발달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산업 혁명에 면직업을 뺀 다른 산업이 고려할 만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이름있는 학자는 없다.] 이런 동아시아 정치를 떠나서 상공업이 발달하는데 필요한 원료도, 오직 조선만이 그것을 독점적으로 갖다가 팔 시장도 없었다. 연간 몇백퍼센트에 달하는 성공률을 담보할 만큼 이윤이 높은 산업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할 것이며,[* 그나마 중국이 자국의 도자기, 비단, 차로 영국과의 교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올렸다. 그로 인해 엄청난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자 손해가 심했던 영국이 이를 만회하려고 했지만 중국에서 거부하자 답이 없어서 아편을 팔아야 했다. 아편은 당시 영국에서도 마약으로 규정해서 나쁘게 보기에 아편 판매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고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달리 보면 당시 영국의 사정은 그거라도 팔아서 부의 유출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산업이 있다고 치더라도 노동력 수급 문제가 남는다. 특히 조선은 잉글랜드처럼 대충 캐면 석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예 농민들의 생활 기반을 부숴버려서 수많은 농민들을 빈곤상태로 만들어 고향에서 내쫓고 도시 빈민, 상공업자로 바꿔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농민반란 등의 사회적 혼란도 각오해야 한다. 가뜩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이 대세인 동양 사회에선 위험부담이 더 컸고 애초부터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나라기에 이를 원하지 않았다. 즉 사농공상을 무턱대고 비난할 게 아니라 그 시대에 배경을 파악하며 어떻게 변화에 왔는지 보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